연말, 산속으로 흐른 사랑의 강물

해마다 12월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훈훈해진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면 일상의 바쁜 일들로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잊고 지낸 사람이나 소외된 이들도 떠오른다. 그래서 12월에 연하장, 성탄카드 같은 것을 보내며 인사하고 사랑과 관심어린 말들을 주고받는다. 이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행위이고 일 년에 한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 돌아보는 일을 실천한다는 것은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왜 연말까지 기다렸다가 인사를 나눌까 하는 질문도 해본다. 일 년 내내 상호 돌봄과 관심이 지속될 수는 없을까? 마치 어느 지인 한 사람이 죽으면 먼 길을 달려와 꽃을 바치고 영정사진을 붙잡고 울고, 유족들에게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과 얼마나 친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존경하고 아끼고 보고 싶어 했는지, 그의 죽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는지 뒤늦게 아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고, 그의 죽음이 그리 안타깝다면 왜 살아있을 때 진작 연락하고 사랑을 나누고 섬기고 돌보지 못했을까? 내동 타인처럼 지내다가 죽은 다음에 굳이 먼 길을 찾아와 애도할까? 죽을 때 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사자가 느낄 수 있을 때 소통하고 정을 나누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죽은 후에 커다란 꽃다발을 낑낑대며 가져오느니 살아있을 때 이름없는 들꽃 한송이라도 주고받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각자의 사랑을 표현하거나 용서의 말, 사과의 말을 하려고 당사자가 죽을 때 까지 기다리지 말아야겠다.

베트남은 열대지방이다. 남부 지방은 사시사철 여름이지만 북부지방은 12월에서 3월 까지 겨울이라 춥다. 특히 중국과 라오스 국경의 고산지대는 영상 1,2도에 까지 내려가 차가운 바람이 불면 살을 에는 듯이 춥다. 집안에 난방시설이 없고 대나무나 너와로 막은 벽과 지붕에서 찬바람이 들어와 겨우내 오들오들 떨며 지낸다. 변변한 옷과 신발이나 양말도 없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이런 추위에 방치되고 얇은 옷가지 하나로 견디느라 감기를 달고 산다. 약을 제때 쓰지 못해 급성폐렴으로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다. 해마다 이 겨울을 나는 것이 그들에겐 큰 고비이기에 필자는 산골 성도들의 가정과 아이들에게 옷, 신발, 양말, 쌀, 라면 등과 같은 생필품을 나눠주고 있다. 하노이에서 물품을 준비하고 여기저기서 두꺼운 옷가지들을 기증받아 산속으로 싣고 가서 나눈다. 2022년 10에 필자의 베트남 비자가 말소되어 새 비자를 받으려고 시드니에서 대기 중이었다. 코로나 이후 베트남의 비자 정책에 많은 변화가 생겨 이전의 방식으론 비자가 어려워져서 새로운 방법으로 비자를 신청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산족 성도들 400여 가정을 돕는 것을 목표로 구호기금을 모집했다. 시드니에 있더라도 그들의 필요를 알기 때문에 진행했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기회나 방법이 별로 없어 기금 마련을 위한 파트 타임 일을 시작했다. 머리를 쓰는 일은 써주는 곳이 없어 노동일을 찾았는데 배달하는 일이 먼저 생겼다. 그래서 첫 배달로 생긴 금액 전부를 주님께 드리며 기도했다. “이 시드 머니를 베트남 산속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바칩니다. 그들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재정을 공급해주세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와 시드 머니에 복을 주셔서 한인, 베트남인, 다문화 및 호주인 교회들을 동원해주셨다. 목표액을 넘는 재정 공급으로 쌀, 라면, 점퍼, 옷, 신발, 양말 등을 박깐, 하장, 메오박, 선라 지역의 여러 교회 성도들과 찔링 고아원 아이들을 섬길 수 있었다. 현지 지도자들이 재정을 지혜롭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2022년 성탄절과 연말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게 전해지도록 했다. 나누면 배가 되는 기쁨과 행복을 모두 체험했다. 시드니의 여러 교회들과 성도들이 이 일에 크게 쓰임 받았다. 시대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함께 바라보며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산속 높은 곳으로 강이 되어 흐르게 하시는 신비한 은혜의 섭리를 다시 한 번 체험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12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전도 원리가 있다. 오늘 날에도 전도와 선교는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전도와 선교의 주체이신 예수님과 성령님의 전도 원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된다. 일단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전도의 근본이며 첫 걸음일 것이다. 예수님의 전도 원리가 마 9:38 -10:16에 소상이 기록돼 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전도 원리대로 선교를 진행하면 큰 오류가 없을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구제사역에 대해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복음보다 앞서가는 빵은 선교가 아니다”라는 비난이다. 그러나 빵이 복음과 함께 가는 것이지 복음보다 앞서거나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다. 마10장 8절에 “병든 자를 고쳐주며”가 전도와 선교의 좋은 예를 제시해준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며 전도하라는 것이다.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으니,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전도 대상자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한 것처럼 내게 있는 것으로 주면서 전도하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가진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이 소망이고 능력이었다. 전도자가 예수를 가졌다면 다 가진 것이고, 예수를 잃었다면 다 잃은 것이다. 예수님의 방법은 없는 것을 도적질해서 주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게 있는 것으로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면서 하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입으로만 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 그것을 주님의 복음과 함께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활용하라는 것이다.

복음의 양손이란 개념이 있다. 스티븐 호크는 총체적 선교가 지닌 역동적 균형을 말하면서 복음이 먼저냐 사회활동이 먼저냐 하는 질문을 하며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먼저 하셨는가 육체의 필요를 먼저 돌보셨는가 하는 질문인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둘 다 상황에 따라 하셨다고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영적인 면과 육적인 필요의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시고 필요에 따라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필요를 공급하셨다. 즉 영적인 문제가 먼저이니 병 고치는 일은 먼저 네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를 영접하면 그 후에 고쳐주겠다 라고 하지 않으셨다. 현지 상황과 필요와 요구에 따라 사역하셨다. 전도 대상자에게 육체의 필요, 구제, 사회 활동의 지원이 당장 필요하면 외면하지 말고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원리이다. 이번 연말에도 주님의 사랑과 복음이 이러한 나눔과 섬김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산속 오지로 흘러가게 하셨다.

안필립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베트남 선교사, 교회개척, 고아원
마약자 재활원 & 신학교 운영
2011년  –현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