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야, 잘 있지? 한국에 잘 도착했어, 오늘 아침 시어머니께도 인사드렸고,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께”. 스물살 꽃다운 나이의 새색시가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본국에 있는 그리운 엄마와 전화로 나눈 대화이다. 그러나 그것이 엄마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그가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한국 남편에게 무참히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몇년 전 어느 신문기사의 내용이다.
베트남에서 온 새색시 N씨는 47세 남편을 믿고 살해당하기 일주일 전에 한국으로 시집왔다. 결혼중개업체의 소개로 한국 남편을 만났다. 27살 연상의 남편은 아빠와 동갑이었지만 그녀에겐 코리언 드림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잘사는 나라라는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낯설고 외로운 한국 땅이었지만 남편의 사랑이라는 한자락 의지처도 있었다. 부산에 있는 10평짜리 작은 신혼집이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한 후 말이 통하지 않아 일주일 동안 줄곳 집에만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되던 날 술에 취한 남편 C씨가 저녁 식사 중에 느닷없이 주먹과 발로 그녀의 얼굴과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리고 부엌에 있는 칼로 그녀를 찔렀다. 스무살 새색시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한국에 온 어린 색시의 안타깝고 허무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다음 날, 그녀의 부모가 한국에 도착해서 황망히 빈소를 찾았다. 그녀의 엄마는 웨딩드레스 차림에 활짝 웃고 있는 어린 딸의 영정사진 앞에서 실신해 버렸다. 아빠도 딸의 시신 앞에서 오열했다. “한국은 왜 내 딸을 죽였습니까”하며 절규했다. 그들을 보는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 큰 슬픔을 준 인면수심의 범죄였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이 멈추질 않았다. 비슷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다. 베트남에서 온 이방의 어린 아내들을 한국 남편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때리고 학대했다. 한국이 왜 이러나 하는 원망이 몰려왔다. 급기야 베트남 정부에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양국 전체의 사회문제로 생각했다. 실사단을 한국에 파송해 가정을 방문하며 그들의 딸들의 결혼생활을 점검했다. 그리고 50세 이상의 한국 남자와는 결혼하지 못하게 했다. 한류의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한국인들을 좋아하고 존중해 주던 이 나라 민심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이제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이 차가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얼굴이 뜨겁다.
이럴 때 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폭풍우 속에서 강하고 거대한 것들이 부러지고 뿌리째 뽑혀 나갈 때 작은 들꽃 한송이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부끄러운 치부가 환하게 들여다 보이는 밝은 대낮을 밤이 주는 덮음과 안온함으로 그 자랑스런 밝음을 때로 부끄럽게 하신다. 벼랑 위의 치열한 시간들을 찬란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차갑게 바라보며 울고 있는 이 나라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선교활동을 통해 만난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인가를 알리고 싶다. 그들도 존중받아 마땅한 소중한 영혼들이고,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매월 700여명의 신부들이 한국 사람들과 결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을 좀더 품고 관심과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그들을 낮추어 보지 않길 바란다. 어느 민족도 더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의 삶을 무시할 권리는 없다.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선교적 정신으로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으로 섬겨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