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 없는 선교지 이야기– 답이 없는 광야
10년 전, 장사꾼들도 오지않는 이곳 오지에서 우리의 광야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정표가 없는 광야적 삶이 선교지였다. 냄새나고 좁아터진 시외버스를 탓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70년대 신용산이나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 같이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고 무질서 했다. 시끄러운 호객행위와 서로 팔을 끌어당기며 어디로 가느냐 밀고 당기고 해서 버스를 타기도 전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공중변소의 더러움과 악취는 상상 이상이다, 그래도 그나마 화장실이라도 있는 걸 감사해야 했다. 아내는 10시간 이상 걸리는 이 시외버스 타길 극도로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26인승 버스에 40여명을 태운다. 2인용 좌석에 3명을 태우고 통로와 모든 빈공간에 사람, 돼지, 닭, 짐을 무차별로 싣는다. 목욕을 잘 안하고 머리도 안감는 현지인들의 쉰냄새는 매번 우리들의 인내를 시험했다. 좌석에 등을 댈 수만 있어도 좋겠다. 산악길에서 차가 쏠릴 때 승객들은 조금이라도 좌석과 등받이를 차지하려고 몸싸움을 한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찰라의 순간에 옆사람을 밀쳐 자리를 확보한다. 이런 몸싸움이 어색한 우리 부부는 늘상 쪼그리고 다녔다. 등을 붙히기 어려우니 몸은 극도로 피곤하다. 이런 지옥 같은 버스엔 에어컨도 없다. 창문을 열면 앞차가 일으킨 길먼지로 눈도 따갑고 숨을 못쉰다. 40도의 폭염 속에서 10여 시간 산길을 달리고 나면 온 몸이 굳고 부서져내려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다.
시외버스는 운행규칙이 없어 운전수와 조수 맘대로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장시간 아무 설명없이 서 있거나, 노선이 아닌 이곳 저곳을 들렀다 간다. 아는 사람 픽업, 짐배달 등이 이유인데 누구도 불평하지 못한다. 불평하는 즉시 조수로 부터 강제 하차 당한다. 그들이 법이고 왕이다. 그러니 도착시간도 둘쑥날쑥하다. 오가는 길에 휴게소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화장실 가는 문제가 심각하다. 들판에 세우거나 거죽 한두개로 막아놓은 화장실에 세워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다. 승객들이 화장실 급하다고 세워달라 해도 절대로 세워주질 않는다. 4-5시간 지나야 세워주는데 그 동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차타는 날은 물을 절대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몸이 더 혹사당한다. 여자들은 당연히 더 힘들 수 밖에 없다.
이 멀고 험한 길로 왜 그 곳으로 굳이 가야 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세우신 곳이었기에 이 말도 안되는 교통수단에 의지해서 말도 안되는 환경 속으로 가야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다. 친절한 안내자나 지침서나 도움의 손길도 없다. 혼자 길을 찾고 혼자 아파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곳이다. 도움의 손길이나 눈 앞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처했던 베트남 선교지는 광야였다. 그리고 그곳 광야엔 이정표도 없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철저하게 고립된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만 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인생의 주인이자 목자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바울의 광야 훈련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게 만들었다. 장사꾼들도 오지않는 이 산속 오지에서 우리의 광야 생활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안필립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베트남 선교사, 교회개척, 고아원
마약자 재활원 & 신학교 운영
2011년 – 현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