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 없는 선교지 이야기 – 다강 언덕에 묻다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연은 때로 기쁘고 슬프고 어이없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을 찢어지게 아프게한 사건 하나를 나누려 한다. 이 시대는 픽션이 범람한다. 유튜브, 틱톡, 인터넷, 소설, 영화, 각종 미디어와 SNS 상에 넘쳐나는 픽션들이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가상현실 VR과 증강현실 AR까지 가세된 현실과 가상세계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논픽션, 즉 하나님께서 지금 써가시는 선교현장의 실제적 스토리가 더 소중할 것이다. 정보의 무질서 시대에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길 원하시는지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발적 고립의 시간, 삶과 생각을 선명하게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래의 짧은 이야기가 이런 시간을 줄 것이라 믿는다. 보안상 본인들의 이름과 지역을 다르게 썼음을 미리 밝힌다.
베트남과 라오스의 국경 산악지대, 그 깊은 산속 오두막 집에 프엉이라는 소수민족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일찍 엄마를 잃었다. 쓰러져 가는 대나무 집에서 여동생 타오를 낳다가 엄마가 죽었다. 술에 쩔어 소리만 지르던 아빠의 까맣던 얼굴은 이젠 기억도 못한다. 엄마가 죽은지 몇년 후에 아빠도 심한 기침을 달고 살다가 죽었다. 이웃들에 의해 5살 짜리 동생 타오와 10세 프엉은 인근 소도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낯선 곳에 보내진 프엉과 동생 타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었다. 모든 것이 무섭고 싫었다. 고아원 언니 오빠들의 눈초리가 싫었고 툭하면 매를 드는 보모들이 무서웠다.
규율이 엄했던 고아원은 어린애들에게 공포와 정서적 불안감을 주었다. 두 아이는 웃음을 잃었다. 뭘해도 즐겁지 않았다. 서로 손을 잡고 늘 구석에만 앉아 있었다. 동생은 언니 손을 붙잡고 늘 울면서 잠들었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무심히 흘렀다. 두 아이들이 18살과 13살이 됐다. 그 즈음에 우리 부부가 그들을 만났다. 정서적 불균형으로 인격이 뒤틀린 상태였다. 우리는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대했다. 말이 없던 그들이 점차 말을 하며 웃기도 하고 우리에게 기대왔다. 언니 프엉을 전문대에 보냈고 동생도 공부시켰다. 아이들이 총명하고 예쁘게 변해갔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몇년 후 프엉이 전문대를 졸업했다. 좋아죽겠다고 따르던 남친이 있어 결혼도 시켰다. 둘은 예쁘게 살았다. 어느 날 프엉이 찾아와 고백했다. “선생님, 이젠 고아원에 간다하지 않고 집에 간다고 말하니 너무 좋아요,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이 없어 늘 허전했었는데 이제 어머니 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는 시부모님이 생겨서 행복해요, 제가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남편이 많이 사랑해줘서 너무 행복해요”.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회복되는 것 같아 감사했다. 그리고 주안에서 계속 행복을 누리며 살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남이 다 가지고 있는 걸 이제야 갖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마음이 대견하기도 했고 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아이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히 프엉은 그의 삶의 절정에 있었다. 이처럼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더 좋은 일이 생겼다. 산속 소수민족 마을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다. 이곳에선 교원자격증이 있어도 배경이나 돈없이 임용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험준한 산속학교로 가려는 사람이 없어 그에게 차례가 왔다. 내일이 부임하는 날이라 오늘 인사차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산으로 올라갔다. 길이래야 가파른 산속의 아슬아슬한 흙길이다. 산중턱에서 프엉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미끄러운 빗속 진흙 길에서 오토바이가 이리저리 쏠렸다. 순간 핸들 콘트롤을 놓친 프엉이 30미터 낭떠러지기로 떨어졌다. 무참히 바위 위로 추락하면서 두개골이 깨지고 온몸이 부서졌다. 쏟아지는 피가 빗물 속에서 바위를 흥건히 적셨다. 그녀는 삶의 절정에서, 희망을 안고 직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렇게 절명했다. 전화 속의 남편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급히 찾아간 그 곳에는 프엉의 처참한 주검이 놓여 있었다. 언니의 죽음에 동생 타오는 실신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있었다. 하늘이 캄캄해졌다. 처절한 마음으로 울었다. 어려웠던 삶, 날카로운 벼랑 위의 위태로운 시간들을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 아이가 이렇게 죽다니. 좀더 행복해도 되었었을텐데, 저려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은 이처럼 아프다. 그가 그토록 소망하던 교사로 부임하려 했던 그 학교 길목, 다강 언덕에 묻어주었다. 이 슬픈 죽음을 모르는 듯 강은 유유히 흘렀다. 여기에 누운 프엉은 이제야 주님 품에서 삶을 관조하는 자유함과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이곳의 삶은 이처럼 치열하다. 프엉의 죽음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환경적 어려움으로 온 것이고 지금도 곳곳에서 지속되는 슬픔이다. 이 어려운 삶의 조각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선교사의 삶의 한 모습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셨듯이.

안필립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베트남 선교사, 교회개척, 고아원
마약자 재활원 & 신학교 운영
2011년 – 현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