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 시대 대형교회들의 각종 인프라의 풍성함과 우월감 앞에서 작은 교회들은 곧잘 자학 증세에 빠진다. 적절한 교리와 합리적인 체제로 무장되었고, 각종 사역 인프라를 풍성하게 갖춘 큰 교회 리더들과 교인들의 당당함과 큰 목소리가 집단의 숨겨진 영적폭력성이나 패거리 문화로 나타날 수 있다. 작은 교회들은 이에 순응하고 굴종하는 것이 교계 생태계의 질서이자 관행이다. 큰 교회는 늘 당당하고 중심에 서있다. 모든 모임의 높은 위치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런 배려가 없을 때 참여치 않거나 피동적 협력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큰 교회의 여러 위용과 권력 앞에서 굴종적이게 된다. 이 시대 교회의 질서와 가치관이 세상과 동일해진 모습이다. 세상은 더 높은 곳으로, 중심으로 나아가길 원하고 있지 않은가? 반면 예수님의 복음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변두리로 흐른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과 외곽지대로 흐른다 (행 1:8). 이것이 복음 안에서의 새 질서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질서를 이미 뒤집어 놓으셨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의 자존감과 정체성과 정당함이 교세에 있지 않음을 되새겨야 한다. 그동안 모든 것의 중심에 서있었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히 받아 들였다면 겸손히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안의 예수님의 복음과 능력이 그 근거이고 출발점임을 다시 기억해 내야한다.
한편, 이 시대 교회들의 안타까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빛으로서의 제자된 삶을 외면하고 적당한 중간지대에 안주하는 것이다. 회색지대의 편안함이 영적도전과 굴기를 외면하는 타성을 갖게 했다. 사명을 잊은 적극적 은혜가 실종된 신앙태도이다. 교회 안의 분주함과 상황에 굴복하고 순응한다. 온갖 훈련들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실력으로 무장되었지만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장 연약한 세대가 되었다. 참 겸손은 목회편의주의적 제도나 편협해진 종교적 시선에게 굴복함이 아니다. 성숙해보이고 낮고 착해 보이고 싶은 신앙태도나 굴종적 자세는 참 겸손이 아니다. 궁극적 겸손은 말씀에 대한 적극적 순종이며 복음의 능력과 질서에 대한 추종이며 섬김과 구령의 열정이다. 예수님이 산상에서 8복을 교훈하신 후에 바로 세상의 빛 된 삶을 강조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숨겨진 신앙인의 덕성을 되찾고 부박하지 않은 감춰진 신앙 인격을 회복하자. 강건한 영적기질을 회복해서 조변석개하지 말고 믿음의 남은 가치를 되찾자. 성도가 주님의 뜻에 따를 때 그분이 하실 일을 하신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실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복음의 능력과 질서에 대한 추종이 향후 10년을 좌우할 것이고, 향후 10년이 베트남 100년의 영성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체제인 이곳은 세계 10대 종교탄압국가로서 창의적인 선교접근이 필요하다. 최근 동역하던 선교사들이 추방되어 더 힘들어졌지만 주님께서 계속 부흥시키신다. 핍박은 부흥의 싸인이라는 격려를 주시며, 부흥이 없는 곳엔 핍박도 없다고 위로하신다. 현재 온갖 이단들과 무슬림이 들어와 교계를 흔들고 있다. 예배 후에 나오는 신자들을 미혹하고 끌고 간다. 앞으로 이곳의 복음화 10 년을 놓치면 100년을 놓치게 되는 영적인 백척간두에 서있다. 깨어 기도하고 시급히 선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화 율이 1% 내외인 이 나라 54개 민족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준비된 지도자들을 동원하여 동역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파송하여 각지에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주사역이다. 그동안 많은 가정교회들이 세워져 개척됐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주님께서 현지인들과 동역하며 가르치고 복음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구제하는 일에 모든 선교적 역량을 집중시키시고 있다.

안필립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베트남 선교사, 교회개척, 고아원
마약자 재활원 & 신학교 운영
2011년 –현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