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현장의 여인들

봄의 언덕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가을의 추수를 바라보는 노동의 현장엔 땀이 있다. 땀 흘려 일하는 일터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 불평, 소외, 멍에, 원망과 절망 같은 것을 가슴에 품고 분노의 충혈된 눈으로 차가운 소주잔을 들이키며 피눈물을 흘리는 곳이 아니다.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일하고 땀을 흘리는 신성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소망의 현장이어야 한다. 일터에서의 땀과 노동이 불평등과 분노와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3:19)”와 같은 성경 말씀들이 이곳 베트남 산야에서 땀을 흘리는 노동의 현장에 딱 맞는 말씀 같다. 산비탈의 화전에 옥수수를 심고, 산들 사이의 작은 평지엔 모를 심어 쌀을 수확한다. 생존을 위해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고 소출을 거둔다. 이러한 땀과 노동의 중심엔 여인들이 있다. 열대 지방의 특성 중의 하나인 모계사회이기에 일상의 중심엔 여인들의 억척이 있다. 논과 밭, 산비탈 화전의 일터엔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남자들은 그늘이나 길가에 열댓 명씩 모여 술 마시고 담배피우며 게으름을 피운다. 남자들이 마약을 접하는 좋은 장소이다. 남자들은 논이나 밭을 가는 것처럼 힘쓰는 일 몇 가지만 돕고 손을 뗀다. 그래서 아낙네들이 새벽부터 망태 메고 들로 나가 물대고, 잡초 뽑는 모든 일을 담당한다. 남자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정치와 전쟁 이야기, 여자 이야기 같은 것을 하며 웃고 떠들다 낮잠을 잔다.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들이 장래를 위해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쌓고, 열심히 일해야 할 텐데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고 계획하지도 꿈을 꾸지도 않는다. 열심히 일하는 의미와 기쁨을 모르니 인생의 낭비이다. 그래서 여인들의 햇볕에 그을리고 땀으로 빛나는 얼굴, 갈라진 손에서 아름답고 위대한 생명력을 본다. 방금 따낸 옥수수 한망태기 지고 언덕길을 내려오는 여인들의 노동력이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이모작 농사일이기에 쉴 틈이 없다. 노동력의 주역인 여성들은 틈만 나면 농산물을 지고 장터로 나온다. 장터래야 작은 규모이다. 옥수수 대여섯 자루, 장작 한바구니, 고구마나 감자 한소쿠리 이고 산을 넘는다. 팔지 못한 장작이나 고구마 바구니를 이고 다시 산 너머 집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면 저무는 석양과 함께 애잔하다. 이곳 여인들은 왜 이토록 치열한 생명력과 억척스러움을 갖게 됐을까? 1859년부터 강대국들의 핍박과 탈취,  속에서의 노예적 삶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독립운동이나 전쟁에 동원됐기에 가정 살림이나 일상의 노동, 자녀 양육의 모든 짐이 여인들의 몫이었다. 남자들이 적들과 대항하고 싸우는 동안 일상의 억압과 핍박, 노동력, 성적노예 생활 같은 수치스런 삶을 살아내고 이겨낸 사람들이 여인들이었다. 남자들이 치열한 저항운동과 전쟁 속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을 일터로 몰아낼 수 없었던 여인들이 농사일을 지속해서 감당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대나무 발에 흙을 비벼 벽을 만들고 너와와 넓은 나뭇잎으로 지붕을 얹은 소박한 집안에 들어가면 부모님, 큰형 부부, 둘째 셋째 아들 내외가 함께 산다. 천으로 침대 사이를 막아 경계를 만든다. 집안 구석에 작은 부엌이 있지만 돌 위에 까만 숱하나 올려놓은 것이 전부이다. 이곳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그들도 모두 빛나는 삶의 내용들을 산자락에 풀어 놓으며 살고 있다. 우주의 중심에 서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그 초라한 움막집이 그들에겐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다.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동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리라. 작은 대나무 움막집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안필립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베트남 선교사, 교회개척, 고아원
마약자 재활원 & 신학교 운영
2011년  –현재까지